중앙대학교 영상콘텐츠융합연구소
Smart Image Content Research Center
Chung-Ang University
Smart Image Content Research Center
Chung-Ang University
총서 제1권 소개글
영상콘텐츠융합연구소는 2025년부터 2031년까지 한국연구재단의 글로벌인문사회융합연구지원사업(과제명: 감성 AI 기반 글로벌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과 이미지 생성 연구)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학술 활동 결과물을 체계적으로 취합하고 확산하기 위해 ‘감성 AI 글로벌 콘텐츠 총서’를 준비하고 있으며, 2026년에 발간할 제1권은 ‘감성 AI- 기술, 예술, 인간의 경계를 다시 묻다’라는 제목의 공동 칼럼집입니다. 감성 AI라는 키워드와 관련된 단순한 기술 소개서가 아닌 ‘인간과 AI가 감정을 매개로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출발점으로 인간-기계-예술의 관계를 재사유하는 학제간 대화의 장을 만들고자 합니다. 이곳에 수록하는 칼럼들은 총서에 담길 원고들의 요약본이자 소개글로 준비했으며, 매주 한 편씩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앞으로 이어지게 될 감성 AI 담론들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7월 2호. AI 그림과 실험실 다이아몬드, 그리고 인간의 자리
미래 전망과 실천적 제안: 인간-기계-예술의 새로운 공존 모델
박진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교수
다이아몬드는 오래도록 사랑의 증거 노릇을 해왔다. 사랑이라는 것이 워낙 눈에 보이지 않는 물건이다 보니, 사람들은 그것을 작고 단단한 돌멩이에 맡겨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반짝이는 돌 하나가 “영원”이라는 말을 대신해주었다. 물론 영원이라는 말은 인간이 가장 빨리 배반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지만, 다이아몬드만큼은 그 말을 제법 의젓하게 받쳐주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수십억 년을 견뎠다는 이야기는, 사랑의 맹세에 필요한 허세와 겸손을 동시에 제공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실험실에서 다이아몬드가 자라기 시작했다. 랩그로운 다이아몬드, 말 그대로 실험실에서 키운 다이아몬드다. 그것은 천연 다이아몬드와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거의 같다. 반짝임도 같고 단단함도 같다. 전문가의 장비 없이는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니 순진한 눈으로 보면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같으면 같은 것 아닌가.
하지만 시장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시장은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다. 시장은 이야기를 판다. 그리고 이야기가 비쌀수록 물건은 더 비싸진다. 천연 다이아몬드 시장이 지켜야 했던 것은 탄소 결정체가 아니라, 그 결정체를 둘러싼 신화였다. “땅속에서 수십억 년 동안 만들어졌다.” “자연이 빚었다.” “세상에 하나뿐이다.” 이런 말들이 다이아몬드의 가격에 보이지 않는 세금을 붙여왔다.
실험실 다이아몬드는 바로 그 세금을 위협했다. 품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너무 비슷해서 문제였다. 엉성한 모조품이라면 시장은 웃어넘기면 된다. 그러나 구별하기 어려운 대체물이 훨씬 싸게 나타나면 사정은 달라진다. 기존 시장은 품질로만 싸울 수 없다. 대신 출신을 따진다. 어디서 왔느냐, 어떤 과정을 거쳤느냐, 자연이 만들었느냐, 사람이 만들었느냐. 우리는 생각보다 이런 질문에 약하다. 양식 광어도 맛있지만, 자연산이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젓가락질이 조금 더 경건해진다.
AI가 만든 그림을 둘러싼 논쟁도 이와 닮아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이제 제법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빛의 방향, 옷감의 질감, 인물의 표정, 환상적인 배경까지 능숙하게 흉내 낸다. 디지털 화면 위에서 인간이 만든 이미지와 AI가 만든 이미지는 같은 픽셀로 이루어져 있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둘 다 이미지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과물만 보지 않는다.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늘 그 뒤에 있는 사람을 상상한다. 누가 그렸을까.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어떤 마음으로 그렸을까.
AI 그림이 불편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너무 빨리, 너무 많이, 너무 능숙하게 나온다. 인간의 손이 더듬고 망설이는 시간이 생략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는다. 저 안에 정말 누가 있었는가. 아니면 아무도 없었는가.
새로운 대체물이 시장에 들어올 때, 기존 시장은 대개 세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지킨다. 첫째는 낙인찍기다. 랩그로운 다이아몬드는 오랫동안 “가짜”, “합성품”, “공장에서 찍어낸 돌”이라는 말로 불렸다. 그 말들은 설명이라기보다 판결에 가까웠다. 품질을 따지기 전에 이미 수치심을 묻혀두는 것이다. AI 그림도 마찬가지다. “영혼 없는 이미지”, “도둑질한 데이터”, “손맛 없는 그림” 같은 말들이 따라붙는다. 물론 여기에는 정당한 윤리적 문제도 있다. 학습 데이터의 출처, 작가 스타일의 무단 모방, 저작권 침해 가능성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비판이 윤리의 옷만 입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생계의 불안, 직업적 자존심, 오래 쌓은 기술이 하루아침에 헐값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함께 들어 있다.
둘째는 라벨 붙이기다. 낙인만으로 부족하면 제도가 등장한다. 랩그로운 다이아몬드에는 별도 표시가 붙고, 감정서가 나뉘고, 때로 레이저 각인이 요구된다. 명분은 소비자 보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소비자는 자신이 무엇을 사는지 알 권리가 있다. 하지만 표시는 단순한 정보 제공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시장의 울타리이기도 하다. “이쪽은 천연, 저쪽은 실험실.” 같은 다이아몬드라 해도 한 줄의 표시가 가격과 감정을 갈라놓는다.
AI 이미지에도 비슷한 표시가 붙기 시작했다. “AI 생성”이라는 태그, 워터마크, 메타데이터 같은 것들이다. 이것 역시 투명성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AI 이미지를 인간 창작물과 다른 방에 넣어두는 장치가 된다. 말하자면 그림에도 출생신고서가 요구되는 시대가 된 셈이다. 사람의 손에서 태어났는가, 알고리즘의 계산에서 나왔는가. 이제 이미지는 자기 얼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족보까지 제출해야 한다.
셋째는 서사의 고급화다. 이것이 가장 흥미롭다. 대체물이 품질과 가격에서 우세해지면 기존 시장은 더 이상 “우리 것이 더 반짝인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그러면 말이 바뀐다. “우리 것은 오래되었다.” “우리 것은 자연이 만들었다.” “우리 것은 드문 것이다.” 천연 다이아몬드는 실험실 다이아몬드와 경쟁하면서 오히려 더 신화적인 물건이 되었다. 반짝임을 파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시간을 팔게 된 것이다.
예술도 비슷한 길로 갈 가능성이 크다. AI가 아름다운 이미지를 너무 쉽게 만들어낼수록, 인간 예술은 아름다움만으로 자신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면 인간 예술은 과정으로 물러난다. 아니, 물러난다기보다 그곳에 성을 쌓는다. 손으로 그렸다. 오래 걸렸다. 실패했다. 고쳤다. 다시 망쳤다. 작가가 그 시간을 견뎠다. 이 모든 비효율이 어느 순간 가치가 된다. 예전에는 완성도가 가격을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그 완성에 도달하기까지의 인간적 우회로”가 가격을 만들 수 있다.
생각해보면 예술은 원래 조금 그런 물건이었다. 우리는 그림을 살 때 물감과 캔버스 값만 치르지 않는다. 소설책을 살 때 종이와 잉크 값만 내지 않는다. 우리는 작가의 이름, 삶, 고집, 상처, 시대를 함께 산다. 어떤 작품 앞에서 “이 정도면 나도 그리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었지만, 막상 그 말이 작품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예술의 값은 결과물만이 아니라, 그 결과물을 둘러싼 믿음에서 생겨난다.
AI는 이 믿음을 아주 노골적으로 시험한다. 만약 보기 좋은 그림이 목적이라면 AI는 이미 충분히 유능하다. 광고용 이미지, 썸네일, 배경 컷, 빠른 시안, 장식적 콘텐츠에서는 AI가 인간을 상당 부분 대신할 것이다. 사람들은 값싸고 빠르고 그럴듯한 이미지를 마다하지 않는다. 주방에서 쓰는 칼에 굳이 장인의 눈물을 요구하지 않듯, 모든 이미지에 작가의 고통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이미지가 그렇게 소비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그림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묻는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그렸을까. 이 선은 왜 흔들렸을까. 이 침묵은 어디서 왔을까. 그런 질문이 살아 있는 곳에서 AI는 쉽게 주인이 되기 어렵다. AI가 이미지를 만들 수는 있어도, 자기 생을 걸고 그 이미지에 책임지는 방식은 아직 인간의 몫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인간 예술을 지나치게 성스럽게 모실 필요도 없다. 예술가도 생활인이다. 마감에 쫓기고, 원고료를 계산하고, 플랫폼 알고리즘에 마음이 상한다. “인간의 고통이 예술의 본질”이라는 말은 그럴듯하지만, 자칫하면 남의 고통을 감상하는 고상한 취미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작업에 의미와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앞으로의 예술 시장은 아마 두 갈래로 나뉠 것이다. 한쪽에는 값싸고 풍부한 AI 이미지의 시장이 생긴다. 이곳에서 이미지는 전기나 수돗물처럼 사용된다. 필요할 때 켜고, 쓰고, 버린다. 다른 한쪽에는 인간의 기원을 강조하는 고급 예술 시장이 남는다. 이곳에서는 “누가 만들었는가”가 다시 중요해진다. 작가의 손, 시간, 몸, 이력, 고통, 심지어 결함까지도 프리미엄이 된다. 알고 보면 참 인간다운 일이다. 기계가 완벽해질수록 우리는 흠집 있는 인간을 더 비싸게 사려 한다.
랩그로운 다이아몬드는 천연 다이아몬드를 없애지 못했다. 다만 다이아몬드라는 물건의 의미를 둘로 나누었다. 어떤 사람은 더 크고 합리적인 실험실 다이아몬드를 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여전히 땅속의 시간과 자연의 우연에 돈을 낸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어리석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인간은 효율만으로 살지 않고, 이야기만으로도 살지 못한다. 대개는 둘 사이를 오가며 산다.
AI 그림도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 예술을 단번에 폐기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인간 예술이 무엇으로 값비쌌는지를 들추어낼 것이다. 우리가 예술에서 사랑한 것이 결과물의 아름다움이었는지, 작가의 손이었는지, 희소성이었는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둘러싼 그럴듯한 이야기였는지를 묻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과제는 AI를 예술의 문밖에 세워두는 일이 아니다. 이미 들어온 손님을 어떤 자리에 앉힐지 정하는 일이다. 안방을 내줄 것인지, 부엌일을 맡길 것인지, 가끔 차나 한잔 내주고 돌려보낼 것인지는 집주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다만 집주인도 알아야 한다. 손님은 눈치 없이 자주 올 것이고, 심지어 일을 꽤 잘할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탄소다. 그림은 픽셀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탄소와 픽셀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거기에 시간을 붙이고, 손길을 붙이고, 사연을 붙인다. 그러고는 그것을 진짜라고 부른다. AI가 아무리 많은 이미지를 만들어도, 인간이 끝내 포기하지 못할 것은 어쩌면 그 사연을 붙이는 버릇일 것이다. 그리고 시장은, 늘 그랬듯이, 그 버릇에도 가격표를 달 것이다.
7월 1호. 회귀의 언캐니에서 부재의 으스스함으로
: AI 영화와 생성적 자동성의 효과
문재철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교수
1. 자동성의 계보 속에서 AI 영화 읽기
이 글의 목적은 AI 영화의 자동성을 완전히 새로운 현상으로 보기보다, 영화가 처음부터 지니고 있던 자동성의 역사적·존재론적 조건 속에서 재해석하는 데 있다. 영화는 카메라와 영사기라는 자동 장치를 통해 세계를 기록하고 투사해 온 매체였다. 따라서 AI 영화의 등장은 영화에 자동성을 처음 부여한 사건이 아니라, 기존 영화적 자동성의 성격을 변형시키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고전 영화의 자동성이 세계를 자동으로 기록하고 투사하는 “기록적 자동성”이었다면, AI 영화의 자동성은 데이터화된 세계의 패턴을 학습한 모델이 아직 촬영되지 않은 이미지를 산출하는 “생성적 자동성”이다. 이 차이는 단순한 제작 기술의 차이를 넘어 이미지의 존재론, 우연성, 저자성, 그리고 관객이 경험하는 낯섦의 성격을 바꾼다.
2. 자동성의 욕망: 피그말리온과 프랑켄슈타인
자동성은 단지 장치가 저절로 작동한다는 기술적 원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비생명적 대상에 생명, 운동, 지각, 창조성을 부여하려는 오래된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피그말리온 신화는 인간이 만든 인공물이 살아나기를 바라는 욕망을 보여주며, 프랑켄슈타인 서사는 그 피조물이 창조자의 통제를 벗어날 때 발생하는 공포를 드러낸다.
이 욕망과 불안은 자동인형의 역사에서도 반복된다. 호프만의 자동인형 올림피아, 프로이트의 언캐니, 모리의 언캐니 밸리 개념은 모두 인간을 닮은 비인간적 존재가 낳는 매혹과 불안을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을 닮은 존재를 만들고, 그것이 스스로 움직이면 매혹되며, 그것이 통제를 벗어나면 불안해 한다. 이 공식은 자동인형에서 영화, 디지털 휴먼, AI 영화에 이르기까지 반복된다.
3. 영화의 기록적 자동성과 회귀의 언캐니
영화는 신체를 만드는 자동인형이 아니라, 세계의 흔적을 움직이게 하는 ‘이미지의 자동인형’이다. 자동인형이 인간 신체의 운동을 기계적으로 모방했다면, 영화는 세계의 이미지를 자동적으로 기록하고 다시 움직이게 한다. 앙드레 바쟁에게 사진과 영화의 특수성은 광학적·화학적 장치가 인간의 손 없이 세계를 자동 기록한다는 데 있으며, 이러한 흔적(지표성)은 영화적 리얼리즘의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 스탠리 카벨 역시 영화를 세계가 인간의 직접적 개입 없이 스크린 위에 현전하는 매체로 이해했다.
이 때 영화의 자동성은 세계를 기록하고, 사라지는 시간을 보존하며, 죽은 이미지와 지나간 세계를 다시 움직이게 한다. 따라서 영화의 언캐니는 회귀의 구조를 갖는다. 이미 지나간 시간, 사라진 장소, 죽은 인물,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 세계가 스크린 위에 되돌아올 때, 영화에서는 부재한 것의 현전이라는 낯선 경험이 발생된다.
4. 디지털 전환과 AI 영화의 생성적 자동성
디지털 영화는 영화의 자동성을 광학적 기록에서 계산적 처리로 확장했다. 필름 이미지가 세계의 물리적 흔적에 의존했다면, 디지털 이미지는 코드, 데이터, 알고리즘, 소프트웨어 처리의 체계 속에서 구성된다. 플루서의 관점에서 카메라와 AI 모델은 모두 프로그램을 가진 장치이며, 창작자는 장치 바깥의 절대적 주체가 아니라 장치가 허용하는 가능성 안에서 선택하고 조합하는 존재이다.
AI 영화는 이 디지털 자동성을 생성 모델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AI 영화의 이미지는 카메라 앞에 놓인 세계를 기록한 결과가 아니라, 데이터화 된 이미지들의 패턴을 학습한 모델이 확률적으로 산출한 결과다. 고전 영화의 이미지가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는 지표적 흔적에 근거했다면, AI 영화의 이미지는 “그런 것이 있을 법하다”는 확률적 생성에 가깝다. 이 점에서 AI 영화는 피그말리온적 욕망의 새로운 형식, 곧 “통계적 피그말리온”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AI 영화는 ‘알고리즘적 프랑켄슈타인’의 불안을 낳는다. AI 모델은 인간의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처럼 보이지만, 그 작동 과정은 불투명하고 결과를 완전히 예측하기 어렵다. 또한 저작권, 데이터 편향, 배우의 권리, 노동의 대체, 책임 소재의 불명확성이라는 문제가 생겨난다. AI 영화의 창작은 단일한 작가의 의도로 환원되지 않고, 데이터셋, 모델 개발자, 플랫폼, 프롬프트 작성자, 편집자, 관객의 반응이 얽힌 분산된 창작 과정이기에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5. 두 우연성, 두 낯섦: 언캐니와 으스스함
고전 영화의 우연성은 촬영 현장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나온다. 빛, 바람, 얼굴의 미세한 변화, 배우의 순간적 몸짓, 거리의 우발적 사건은 카메라 앞에서 세계가 스스로 드러내는 존재론적 잉여를 지닌다. 반면 AI 영화의 우연성은 학습 데이터의 분포, 모델의 확률적 구조, 프롬프트의 조건, 플랫폼의 필터링 안에서 조절된다. 따라서 AI 영화의 우연성은 세계의 우연성이라기보다 확률적으로 관리되는 우연성에 가깝다.
이 차이는 낯섦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영화의 언캐니는 사라진 것이 되돌아온다는 회귀의 구조를 갖는 반면 AI 영화의 낯섦은 처음부터 존재한 적 없는 이미지 앞에서 발생한다. 이미지가 있지만 촬영된 세계는 없고, 얼굴이 있지만 배우의 신체는 없으며, 움직임이 있지만 그것을 수행한 행위자는 없다. 이 때 AI 영화의 낯섦은 프로이트적 언캐니보다 마크 피셔가 말한 ‘으스스함(eerie)’에 가깝다. 그것은 행위가 발생했지만 행위자를 찾을 수 없거나, 있어야 할 행위자가 부재하는 자리에서 생겨나는 낯섦이다.
6. 자기기록에서 자기파생적 복제로
이 구분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논의와도 연결된다. 영화가 지표를 통해 실재를 참조하는 세계의 자기 기록이었다면, AI 영화의 이미지는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들의 데이터셋, 곧 이미지의 이미지들을 참조한다. AI 영화는 세계의 사본이라기보다 이미지들의 모델로부터 파생되는 이미지이며, 이 점에서 모델이 실재에 선행하는 시뮬라시옹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결국 AI 영화의 새로움은 자동성 자체가 아니라 자동성의 존재론적 위치와 그 무의식적 효과의 변화에 있다. 변화는 기록에서 생성으로, 지표에서 시뮬라크르로, 세계의 우연성에서 확률적으로 관리되는 우연성으로, 회귀의 언캐니에서 부재의 으스스함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여전히 인간이 자기 바깥의 장치에 생명, 운동, 지각, 창조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오래된 욕망이 작동한다. AI 영화는 자동성의 욕망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성 모델의 차원에서 다시 출현시킨다.